해가 바뀌었으니 벌써 두 해는 된 이야기다. 부산에 사는 한 70대 중반의 할머니는 폐지를 주워 평생 돈을 모았다. 먹고 싶은 거 먹지 않고, 입고 싶은 거 입지 않고, 모은 돈이 1억 가까이 되고 있었다. 돈을 직접 관리해야 안심이 됐던 할머니는 은행 예금을 하지 않았다. 대신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지폐를 수표로 바꿨다. 그리고 집에 쌓아둔 폐지 상자 하나를 골라 넣어뒀다. 그런데 어느 날 어처구니없게 그 돈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50대의 아들이 폐지 더미를 고물상에 팔면서 그만 그 상자도 넘겨버렸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캄캄한 새벽 댓바람에 경찰서로 달려가 돈을 찾아달라고 읍소했다. 경찰관들은 아무도 접근 못 하게 고물상을 지켰다가 날이 밝아 고물상이 문을 열자 돈 봉투를 찾기 시작했다. 마당에 가득한 폐지 더미를 맨손으로 더듬어 헤집기 1시간여, 드디어 그 돈 전액을 할머니에게 찾아 줄 수 있었다고 한다.

온라인 신문에서 이 할머니 기사를 읽고는 ‘참 다행이구나!’ 했다. 하지만 기사 밑에 달린 댓글을 보니 그냥 다행이기만 할까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숨겨놨던 큰돈을 아들이 알게 됐으니 그 돈은 더 이상 할머니 돈으로 남아있지 못할 거란 댓글 탓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부모 자식 간 돈과 관련해 들은 이야기들도 있던 참이었다. 동네 은행 직원의 말인 즉, 한 번도 들린 적 없던 아들이 찾아와 자신의 예금을 조회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주거래 은행이니 아들 이름으로 한 예금이 있으리라 여긴 것이었다. 예상은 맞았다. 순전히 어머니의 돈이었다. 그렇다고 그 돈을 인출해 가지는 않았다. 금방 들통이 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 예금을 담보로 대출을 요청하더란다. 곧 갚을 거니까 엄마에게는 절대 비밀이라면서. 더러는 이런 예금을 아예 자기 돈인 양 찾아가는 자녀들도 있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부동산을 처분해 애인과 미국으로 줄행랑을 친 딸의 이야기도 한 다리 건너 지인에게서 들었다. 딸 명의로 했을 뿐 노후를 위해 마련해 뒀던 재산이 홀랑 날아간 바람에 팔순을 바라보는 부모는 생활고를 겪고 있다고 했다. 이 정도는 아닐지라도 ‘부모 돈=내 돈’이란 이상한 공식을 어렵지 않게 보고 들을 수 있는 요즘이다.

‘부모 돈=내 돈?'

최근 한 은퇴설계 전문가에게서는 이런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해외여행을 간다는 부모나, 예쁜 할머니와 사귀며 종종 비싼 선물을 구입하는 홀아버지를 걱정한다는 자식들이 있지요. 그 가운데 진정 부모보다는 그렇게 돈을 씀으로써 내게 돌아올 게 줄어들 걸 걱정하는 자식은 없을까요?” 재산 문제로 인한 자식들 눈치 때문에 재혼을 망설이는 노년층 이야기도 흔하고 보면 그의 이야기는 지나친 것만은 아닌 듯했다. “그래서 현명한 할머니는 재혼하려는 할아버지에게 ‘재산 있냐’가 아니라 ‘연금 타냐’고 묻는다.”는 그의 덧붙임 또한 농담만은 아니게 여겨졌다.

부모가 종신연금을 선호하는 것도 자식의 성화로 중도 인출할 염려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어서라고 한다. 부모가 아파트를 역모기지에 맡긴다거나, 수억 원의 보증금을 내고 민간 실버타운에 들어갈 때 자식들이 속앓이를 하는 경우도 다반사란다. 한 번도 와보지 않다가 부모가 세상을 뜨고 나면 장례 치르기가 무섭게 실버타운을 찾는다고 한다. 방 정리를 서둘러야 한시라도 빨리 보증금을 반환받을 수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결국 ‘부모 돈=내 돈’을 염두에 둔데서 모두 비롯되는 이야기들이다.

얼마 전 한 신문에서 ‘돈과 가족 간 접촉 빈도’에 대한 논문을 인용한 글을 보니 60세 이상 부모가 자녀와 얼굴을 마주치는 빈도는 돈과 연관이 가장 크다고 한다. 부모 소득이 1% 높아지면 자녀와 1주일에 한 번 이상 마주할 가능성이 2배 이상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OECD 14개 회원국을 분석해본 결과, 대부분 국가의 자식들은 돈 있는 부모보다 없는 부모와 얼굴을 마주하는 경우가 더 많은 걸로 나타났다. 한 사람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을수록 인적 네트워크가 커져서 상대적으로 부모나 자식 등 친족과의 접촉 빈도는 낮아지는 게 일반적인 까닭이라고 한다.

하지만 유독 한국만은 그 반대 현상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친족 관계는 정서적이라기보다 다분히 도구적 성격이 강하다는 설명이었다. 무슨 일을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도구 아닌가. 부모건 자식이건 간에 도움을 얻을 게 있어야 자주 본다는 얘기가 된다. 더 이상 도움을 주기보다 받아야 할 처지가 되어가는 황혼녘의 부모라면 외면당하기에 십상이란 얘기도 된다. 그러니 자식과 손자 얼굴을 자주 보려면 죽을 때까지 돈을 움켜쥐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일 게다.

주머닛돈 쌈짓돈의 뉴 버전

부부 사이는 일심동체로서 ‘주머닛돈이 쌈짓돈’이라 했지만, 맞벌이가 보편화한 이제는 옛말이 되고 있다. 각자 벌어서 가정생활에 필요한 만큼 분담하고 나머지는 자율적으로 사용하려는 부부들이 많아지고 있다. 남편이 혼자 벌더라도 아내가 남편 통장을 관리하는 식은 지양하라고 한다. 아내 통장을 별도로 만들어 남편 통장에서 매월 일정액을 자동이체하거나 목돈으로 찾아 넣고 쓰라는 권고다. 부부 사이에서도 돈이 나오는 번지수는 달라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부모와 자식 간에는 그 번지수가 같은 ‘주머닛돈=쌈짓돈’ ‘부모 돈=내 돈’의 공식이 오히려 공고해지고 있는 듯 하니 웬일인가. 오죽하면 '빨대족'이란 신조어가 다 생겨났으려고! 부모의 노후자금에 빨대를 꽂아 제 것처럼 사용하는 자식들이 요즘 늘어나고 있다고 이름 하여 빨대족이란다. 이런 풍조야말로 시대를 거스른 주머닛돈 쌈짓돈의 뉴 버전이라고나 해야 하나.

문제는 분리가 잘 안 된다는 데 있는 것 같다. 자식은 스무 살이 되면 배를 태워 떠나 보내야 하는 존재이건만 한국 부모들은 그 배를 함께 타려 한다는 지적이 그렇다. 자식을 진정 사랑한다면 감당해야 하는 분리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분리를 견디어 낼 수 있는가, 거리를 가진 다음에도 사랑할 수 있는가, 부모는 자문하라고 한다. 동시에 자식은 경제적으로 독립할 때 진정한 독립이란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부모와 따로, 또 함께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자연스레 주머니와 쌈지도 따로, 또 함께 행복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출처 : 성진선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1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