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년 '원조의 원조' 이경순 할머니]
간판없이 빈대떡 하나만 팔던 식당, 물린다는 손님에 족발 내놔 대박
장충체육관·국립극장 들어선 후 농구 선수·성악가·배우가 단골손님
여행 책자에 서울 명소로 소개되자 연휴에도 中·日 관광객 꽉 들어차
지난 22일 추석 연휴인데도 서울 장충동 '평안도족발집'은 중국과 일본인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손에는 여행 책자가 들려 있었다. 올해 말 리모델링되는 50년 역사의 장충체육관과 함께 이 족발집이 서울의 '명소'로 소개된 덕분이다.
이경순(77) 할머니가 이 집의 주인이다. 52년 동안 장충동을 떠나지 않고 지켜 온 '산증인'이다. 이 할머니가 처음 족발을 팔던 당시를 떠올렸다. "족발은 원래 이북에서 먹던 음식이었어요. 빈대떡에 물린 손님들이 다른 건 없냐고 묻기에 족발을 내놓기 시작했죠." 허름한 판잣집에 간판도 없었지만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장사가 잘된다는 소문을 타고 장충동은 물론 서울 곳곳에 족발집들이 생겨났고, 이 집은 '원조 중의 원조'로 불렸다.
이경순 할머니의 고향은 평양이다. 부친이 일제강점기 평양에서 일식당과 과일상점을 운영하던 부유한 상인이었다. 하지만 해방 후 북한에 들어선 공산주의 정권은 그의 식당과 가게를 몰수했다. 일본인을 상대로 장사를 했다는 이유로 반동으로 몰았다. 결국 이 할머니의 가족은 1947년 북한을 벗어나 남한으로 내려왔다. 당시 이 할머니의 가족은 배에 달아맨 보자기에 금을 숨겨 나왔다고 했다. "평양 상인들은 금을 뒤주에 숨겨두는 습관이 있었어요. 갖고 나온 금을 밑천으로 어머니가 동대문시장에서 옷가게를 열었죠."
'평안도족발집'이 문을 연 건 1961년. 당시 이 할머니의 손위동서가 식당 사장이었고, 서울여상을 졸업한 이 할머니는 가정교사를 하면서 식당 일을 도왔다. 그러다 1970년대 초 본격적으로 맡아서 하기 시작했다. 택시 세 대로 택시회사를 경영하던 남편의 사업이 망해서다. 자동차 두 대 가격을 빚으로 졌다. "아들 둘 공부시키려다 보니 제가 뭐라도 해야만 했어요."
1963년 장충체육관이 8000석 규모 실내체육관으로 문을 열면서 족발집은 감독과 선수들이 찾는 명소가 됐다. "박한, 김동광 부터 허재, 한기범까지 당대 농구 선수들과 감독들이 찾아왔어요. 프로레슬링 천규덕 선수도 단골이었지요." 1973년 남산에 국립극장이 개관하면서부터는 클래식 음악가와 배우들도 찾기 시작했다. 한국 성악계의 거목인 원로 성악가 오현명 한양대 음대 명예교수는 2009년 숨을 거두기 전까지 제자를 시켜 음식을 사갔다고 했다.
이 할머니의 족발집을 필두로 장충동에 족발집들이 번성하다 보니 원조 논란도 생겼다. 하지만 이 할머니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다른 집들이 원조라고 써 붙여서 찾아가 항의를 해보기도 했어요. 지금은 그냥 우리 집 간판에 '원조의 원조'라고 써 붙여 뒀지요(웃음)."
이 할머니가 삶아내는 족발은 냄새가 구수하면서 육질이 쫀득해 인기를 끌었다. 허영만 화백의 음식 만화 '식객'에도 이 할머니의 식당과 얼굴이 그대로 나온다. "특별한 재료가 들어간다는 건 다 거짓말이에요. 간을 잘 맞추는 게 가장 중요하지요. 생강을 많이 넣은 국물로 고기 누린내를 없애고 왜간장으로 향과 색을 내요. 불을 세게 해 오래 끓이는 게 요령이에요." 현재 식당은 조카며느리 홍순옥(54)씨가 3년 전부터 함께하고 있다. 이 할머니는 족발의 맛을 지키기 위해 매일 아침에 나와 솥을 지키며 족발을 삶아 낸다.
50년 이상 식당으로 성공할 수 있는 비결에 대해 이 할머니는 "사람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농구 감독이나 선수를 보면 그 사람 경기에 대해 말을 했어요. 성악가를 볼 때엔 그분 공연 잘 봤다고 얘기를 해줬어요. 어릴 적부터 장사하는 아버지를 보고 자라 상인의 피가 흘렀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