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앞이나 청담동이 젊은이들의 해방구라면 파고다공원과 종묘 앞은 어르신들의 해방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하나는 활기와 화려함이 넘치고, 다른 하나는 좌절과 분노 그리고 초라함만 짠하게 깔려 있습니다. 물론 젊음과 노쇠를 에너지와 경제력으로 단순 비교하는 건 별 의미가 없을 만큼 빤하니 언급할 것도 없겠지만 말입니다.

저는 인생의 선배들이 남은 삶에서 그렇게 소외당한 채 공원에 초라하게 몰려 있는 걸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집에 있자니 눈치 보이고 답답해서 나왔다지만 밖이라고 뭐 다르겠습니까. 안팎으로 내돌림당하는 신세니 세상을 보는 눈이 따뜻할 리 없고 그럴수록 자신의 처지는 원망스러울 뿐이지요. 나이 들면 세상사에서 밀려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순리겠지만 문제는 내동댕이쳐지고 있다는 차가운 현실입니다. 더구나 그 어떤 세대보다 열심히 살아왔는데, 존경은커녕 냉대와 외면 속에서 눈치만 봐야 한다면, 그건 아니지요.

그렇다면 그분들의 자존감을 회복시켜줄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파고다공원이나 종묘 앞에 노인도서관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하릴없이 시간 때우지 말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해드리는 거지요. 밝은 조명에 돋보기나 확대경을 마련하면 노안으로 인한 불편함은 어느 정도 해소될 것입니다. 그분들, 그동안 사는 게 바빠서 예전의 풍부한 감성이나 지식에 대한 욕구는 덮어놓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시간은 주체하지 못할 만큼 넉넉하니 그분들이 차분하게 책을 읽을 수 있게 해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나이 들면 생각이 멈추는 걸 노화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단정할 일이 아닙니다. 더 이상의 지식을 습득할 창구도 없고 직접적인 욕구가 줄어들어서도 그렇지만, 지식과 정보를 얻는 습관이 배지 않아서 생각이 멈춘 측면이 더 강할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인들이 선거 때마다 보수적이고 때로는 계급 배반적으로 투표하는 걸 안타까워하기도 하지만, 그 근본적 원인도 따지고 보면 시대의 변화에 따른 적절한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지 못하고 과거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앞으로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대거 실버 계층에 흡수될 텐데, 그 수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세상과 시대는 빠르게 변화하는데 당당한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서도 그런 변화에 따르지 못하는 건 우리 사회에 바람직한 일이 아니지요. 그러니 정치적 건전성을 위해서도 끊임없는 정보의 습득은 필수적입니다. 세상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없으니 자꾸만 옛날의 판단구조에 갇혀 지내는 겁니다. 그냥 갇혀 있는 게 아니라 그나마도 퇴색해가는 상태로 말입니다.

책은 단순히 지식과 정보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도 풍부하게 해줍니다. 지금은 그저 나이 들어 힘없고 초라해 보일지 모르지만 지금의 실버 세대들만큼 풍부한 감성을 경험한 이들도 드물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사는 게 너무 힘들고 변화가 가팔라서 그걸 누려볼 시간도 여유도 없었을 뿐입니다.

노인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요? 천만에요! 책 읽을 곳 없고 책 살 돈 없어서 그럴 뿐이고, 오랫동안 시간 없고 살기 힘들어 책을 멀리했을 뿐입니다. 가난했지만 넘치는 지식욕으로 문고판 전성시대를 구가했던 형님들, 그리고 누님들! 인생 선배의 진면목을 다시 한번 보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