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부는 전철노선도를 바라보며 목적지에 갈 방법을 의논한다. 그분들이 유난히 내 눈에 띈 것은 뒤로 잡은 두 분의 손 때문이다. 나이 드신 할아버지는 청년 못지않은 힘으로 할머니 손을 끌어 잡았다. 잡힌 할머니 손은 수줍지만 행복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다.

몇 년 전 미국여행 때 맥도날드에서 아침을 먹는데 곱게 늙은 노부부가 아침 햇살 같은 미소를 뿌리며 들어와 모닝 세트를 아주 천천히 드시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을 보았다. ‘저 나이가 되도 할 말이 저렇게 많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나도 모르게 덩달아 입꼬리를 올리며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렇게 늙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머리에 꽉 차올랐다.

전철 노부부 옆에는 어떤 할아버지가 홀로 서 계신다. 그 할아버지도 나처럼 노부부를 곁눈질하고 있다. 그 뒤에 선 나는 대비되는 두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오고 홀로 계신 할아버지가 상대적으로 안쓰러워 보였다. 맘 같아선 구색 맞추려 그 할아버지 옆에 그냥 서 드리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노부부와 할아버지는 나란히 경로석에 앉으셨다. 장밋빛 레이스 블라우스를 차려입고 짧은 챙에 밤색 리본을 두른 밀짚모자도 잊지 않으신 할머니는 무슨 이야기인지 재잘재잘 할아버지를 향해 노래 부르듯 말씀하신다. 할아버지는 아직도 손을 꼭 잡은 채 너털웃음을 웃으신다. 갑자기 할아버지는 어깨 떡 벌어진 청년처럼 보이고 할머니는 해맑은 소녀같이 웃는다.

‘참 아름다운 모습이다!’라고 생각하며 손잡기에 대해 편견이 심했던 나의 철없는 시절로 돌아갔다. 그때 나는 순도 100%의 순수한 사랑을 꿈꿨다. 그 척도의 첫 단계가 ‘손잡기’였다. 손잡기를 시도하는 남자는 모두 탈락이고 시도한 날, 그날로 이별이었다. 아마도 참을성 없는 괜찮은(?) 남자 몇 명은 이 그물망에서 쭉정이 신세가 되었으리라. 지금 생각하면 가혹하지만, 그 시절의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학 4학년 종강 파티 때였다. 학창시절 마지막 파티라 우리는 명동의 20층 건물 스카이라운지로 장소를 정했다. 물론 쌍쌍파티다. 파티가 끝나고 집에 가려는데 정전(停電)이 되었다. 20층인데 엘리베이터 가동이 안 되는 상황이다. 나는 한달음에 불 꺼진 20층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지금 남편이 아닌 그때 사귀던 내 파트너는

“미령 씨! 그러다 넘어져요. 같이 가요.”

“괜찮아요. 천천히 오세요.”

손잡을까 봐 후닥닥 내려와 보니 겨울인데 퍽 더웠다. 위기가 닥치면 아버지 고향인 함경도 기질이 나와 또순이가 된다. 독립운동이라도 하듯 무척 씩씩한 모습이다.

종달새 같은 할머니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자랑스러우신 듯 할아버지는 어깨가 쑥 올라간다. 옆 할아버지도 할머니 재담에 귀를 기울이신다. 할머니의 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이 빠질세라 조금 더 잡아당겨 챙겨 잡으신다. 이런 영국 속담이 떠올랐다.

'Age does not protect you from love. But love, to some extent, protects you from age. (나이 들어도 사랑은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랑은 노화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